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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진흥위원회] 안성기 배우 KAFA 전문가클래스 후기 확인해볼까요
    카테고리 없음 2020. 2. 24. 11:57

    영화진흥위원회 SNS기자단 후기) 영화진흥위원회 KAFA(한국영화아카데미) 안성기 배우 마스터클래스에 다녀왔습니다.12월 41, CGV명동 역의 시네 라이브러리에서 행사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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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네 라이브러리 입구에서 본 포스터다.이 날이 올해 마지막 전문반이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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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행사 등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만난 배우이긴 하지만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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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네 라이브러리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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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대로 많은 분들이 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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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행사는 주례 성철의 시네 21편집장의 사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본격적인 행사에 이미 안성기 역이 출연한 영화가 다소 음침한 영상이 상영됐습니다.상영이 끝난 후 배우와 사회자가 무대에 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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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안성기 배우제)주례 성철의 시네 21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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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데뷔 60주년을 맞은 안성기 배우.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대한민국 영화의 페르소나, 나쁘지 않다는 스토리는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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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성철 편집장) 정성일 평론가로부터 안성기 배우는 우리 모두이고, 우리 모두 안성기 배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안성기 배우는 거짓 없이 거의 모든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지금 본 영상에 삽입된 영화중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와 영화가 있다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합니다.안성기 배우)5세 때<황혼 열차>로 영화를 시작해서 중학생 때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고교생 때 2개를 촬영했습니다.. 그 후 대학에 진학하고 학업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2년 방콕 하면서 지낸 후에 다시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에.. 실제로 영화를 한건 50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중 일 30여편의 필름이 남아 있는 상태인 소실된 영화까지 합치면 어린 시절에 70여편. 어른이 되어 90여편에 출연했다.어렸을 때 영화를 할 때는 뭐가 좋은지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제가 판단해서 출연했어요. 거의 매일 본 영상에 제가 좋아하는 영화가 한 장면씩 나온 것 같아요.성인이 된 후 70년대 후반부터 영화에 출연했지만 70년대 한국 영화계는 암울한 시기 욧움니다. 사전 심의가 있었고 영화를 완성한 뒤에도 수정, 삭제하는 등 할 말을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병사와 아가씨들>< 제3공작>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일 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라다 프랑스어 좋은 날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사회성이 많기 때문에 영화 관계자들이 개봉을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봉하게 됐어요.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국 영화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이라고 소견합니다. 제펜에서는 <장미더블>이 한국 뉴웨이브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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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세계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많은 외국인이 <만다라>를 통해 한국 영화에 친숙하게 다가왔습니다"1984년에 자신 온<고래>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이 좋아한 영 말 이다니이다. "고래를 잡으러 간다는 상징성, 로드무비의 형식,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영화였습니다"'깊고 푸른 밤'은 LA로케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당시(캉・스용), 장미희 배운 LA에 거주하고 한정으로 스태프 12명이 영화 촬영 때문에 미국에 갔 움니다. 그곳에서 숙소로 사용할 집 한채를 3개월 동안 빌려서 100쵸쯔강 촬영했습니다.. 이민 온 듯한 아주 머니가 서 프츄이울 줬고, 자동차는 3대를 사용했다. 벤 2대와 내가 영화에서 조종하던 스포츠 카, 그것이 욧움니다. 이 영화는 당신이 필름을 미국 현지에서 현상했는데 LA 광량이 좋아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그리고, 이 결과물은 당시의 영화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색깔, 분위기를 낼 수 있어서 본인...'이라는 소견을 하게 해주셨습니다. 어쨌든 저는 다음 영화에서 섹시한 역을 맡은 적이 없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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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기 배우) <칠수와 맨수>는 '완전 동시녹음'이라는 스토리를 마케팅 문구로 쓴 영화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만큼 큰 기술이었으니까요. 이 영화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사거리 건물 위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첫평 남짓 한 좁은 공간에서 박중훈 배우와 내가 둘로 촬영했지만 오르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에 점심 식사하러 오는 게 귀찮은 정도였습니다. 거기서 2주간 촬영했는데 촬영장에 나올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89년에 첫 연간 촬영한<남부 군>은 봄에 한달 반, 여름에 한달, 그리고 가을을 거쳐서 겨울에 오대산에서 2개월간 촬영했다. 이 영화는 빨치산처럼 촬영했다. 오대산은 국립공원이라 촬영시 제약이 많았습니다. 불을 피워도 안 돼서 겨울 촬영이 힘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최신과 같은 기능성 속옷도 없었기 때문에, 보다 어려운 촬영을 강요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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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기 배우)베트남전 영화 '하얀 전쟁'을 얘기했고, 이미 저는 외대 베트남어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내가 다시 영화를 제작하게 된 것도 베트남어 때문이야. 1970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곧바로 당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장 저는 베트남에 가야할 것 같아서 sound를 먹고 베트남어 전공을 선택했어요. 이리하여 역시 장교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ROTC에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베트남 파병이 금지되면서 그해 철수가 시작됐습니다. 결국 저는 베트남에 가지 못하고 전방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베트남이 공산화 되어 군복무를 마치고 과인서 베트남어 전공으로 취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앞길이 막히고 소견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 아니겠어?어렸을 때는 영화의 매력을 못느꼈어요. 늘 불려 다니고 살았거든요. 어쨌든 영화를 하고 싶어서 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등록했어요. 그러나 1학기를 마치고 공부는 나의 길은 아니다. 것이라는 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다른학생들보다 더 잘하지는 못하겠구나 라는 소견을 듣고 과감하게 그만두고 현장에 나가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직후 당시에는 외국 영화가 1년에 24개 정도만 공개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를 보려면 프랑스 문화원 같은 곳에 다녔습니다. 하나하나에서 당신이 프랑스 문화원에 가기 시작해서 바로 당시부터 시작한 체육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병사와 아가씨들>에서 영화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하얀 전쟁>을 하게 된 계기는..당장 당시의 베트남에 관한 책을 아무거나 조사해서 읽고 있었지만, <남부군> 촬영을 하면서 안정효 작가의 <하얀 전쟁>을 볼 수 있었어요. 이 책을 읽고 영화화를 하면 된다는 소견이 들어 정지영 감독(남부군 감독)에게 이 책을 보여주고 영화화를 하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고 했어요. 그 후 정지영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했고, 제가 주연을 맡았어요.<투C스>는 비판의식이 있는 코미디 영화로 사랑받아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통해 아내 sound에서 조연으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늘 주연만 하고 조연만 하다 보면 뭔가 잃은 것 같다는 소견이 있어요. 하지만 이 영화가 끝난 후 보다보니 조연으로도 존재감이 있어 과인...이라는 소견과 함께 존재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장 당시부터 굳이 주연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 선택의 폭이 넓어져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그 후 <무사>에서의 연기로 청룡영화상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sound를 수상했습니다. [무사] 얘기를 하다 보니까... 이 영화는 5개월간 100%중국 칼리 오 장소에서 촬영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직접 액션 연기를 소화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고 중국 액션 감독이 많이 놀랐대요. 이렇게 해서 이 영화가 중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군요.개인적으로 <라디오스타>도 좋아합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따뜻한 감동이 오는 영화라고 소견합니다.이 영화는 강원도 영월에서(영화에 나 오는 대로 그 모텔에서)2개월간 머물며 촬영했습니다.주례 성철의 편집장)의 안성기 배우가, 박중훈, 배우와 함께 한 4편의 영화를 다 좋아합니다.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당시 <깊고 푸른 밤>이 대종상을 휩쓸었던 기억이 납니다.그렇게 곧바로 당시 영화잡지에 왼쪽은 깊고 푸른 밤의 안성기 배우, 오른쪽은 택시운전사의 로버트 드니로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그 사이엔 VS라는 글자가 있고...) (안성기 배우)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은 금방 눈에 。니다. 연기자도 확실히 찔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건 그냥 빠져드는 게 아니에요. 꽂히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카메라가 왔을 때의 시간(눈의 힘)이 중요합니다. 그걸 틀리면 관객과 통하지 않아요.지금 하고 있는 순간에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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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성철 편집장) 남부군, 하얀 전쟁, 만다라... 금기에 도전하는 영화에도 출연했어요. 금기에 도전하는 신인 감독들에게 큰 힘과 버팀목이 돼준 것 같아요. <올드 보이>다음 korea영화에 훙미울 갖게 된 해외의 평론가가 80,90년대 korea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의 대부분에 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 오더라... 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웃음) 그리고 그 영화들을 보면 다 닮지 않았어요 안성기 배우를 나쁘게 하지 않는 감독들에게 안성기 배우의 어떤 영화를 가장 나쁘게 보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답이 제각각이다.그 시대의 Korea 영화는 Korea 영화는 안성기였고 안성기가 Korea 영화였다고 소견한다.동시에 많은 배우들이 피하지 않은 80년대 토속 에로 연기를 피하고 갔지만 이런 일이 생긴 것은 투철한 인내, 자기 관리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안성기 배우)70년대 후반에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고,'영화를 하며 존경을 받을 수 없을지언정 멸시는 받지 말 아야야...'는 소견을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목표는 영화하는 사람을 존경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주제가 분명하고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사회성이 강하다. 의미있는 영화를 주로 선택했어요. 그리고 겹치기 출연을 안 했어요.


    그 밖에 연기자에게 단편소설 독서를 추천한다는 이야기, 김기덕 감독의 신작 인간의 시간에 출연한 이야기 등도 해줬어요.아내 Sound부터 끝까지 배우 안성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아주 귀중한 자리였습니다.저는 한국영화=안성기로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라 감개무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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